본문 바로가기

[장편] 불면인

불면인 #27 . 뒷모습



뒷모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동네에 새로 생긴 함바식당 주방에서 시든 채소와 묵은 밥을 얻어다먹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친절했다. 신축빌라를 짓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는 천막식당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당분간은 채소를 먹어야 할 거라고 했다. 내 몸은 여전히 건선에 시달리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눈보라처럼 각질을 뿌리고 있었다. “몸 상태를 보니, 기름진 거 먹었다가는 큰일 치르겠구먼.” 아주머니는 내 병에 대해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학교는 변함없이 조용했고, 방문하는 손님도 여전히 없었다. 불안감도 그대로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먹을 것은 넉넉했다. 읽을 책도 충분히 주워왔다. 일찍 눈을 뜬 나는 배춧잎과 고추장과 찬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문득 피부과 의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를 떠올리면 그가 먹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음울함이 함께 떠오르곤 했다. 그의 영혼의 처소에는 날씨와 상관없이 늘 비가 내렸다. 그의 눈동자는 우물에 빠진 꽃잎처럼 늘 젖어있었다. 늘. 늘. 슬픈 기억은 가슴에 구멍을 낼 뿐, 메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쩌면 여생을 내내 뚫린 가슴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번은 그에게 종교를 가져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신? 신을 믿어보라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품은 공허를 메울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의 구멍 난 영혼과 똑같은 성분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물질이었다.

나는 오늘 하루 집을 비우기로 했다. 어디로든 걷고 싶었다. 조금 멀어도 괜찮을 것이다. 걸으면서 복잡한 생각과 무거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버스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다리를 떠올렸다. 그 부근에는 꽤 큰 광장도 있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책을 한 권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뛰어야 했다. 광장 앞에 닿자 몸이 훈훈해졌다. 다리 위에 올랐다. 흐름을 멈춘 듯 얼어붙은 강물은 오래 보고 있을 풍경이 아니었다. 차라리 장마 때의 흙탕물 구경이 나을 듯했다. 나는 광장으로 내려와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얼굴 구경을 시작했다. 조금 전에 내 앞을 지나간 남자는 기왓장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각이 지고 단단하다. 저런 얼굴은 웃어도 웃는 티가 나지 않는다. 빨리 걷기를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시추를 닮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없다. 광장의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다. 추위 탓일 것이다. 한쪽 팔을 떨며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은 얼굴빛이 노랗다. 그는 안타깝게도 무덤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망자의 피부색을 가졌다. 광장 저편에는 뭔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왔다갔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저런 사람을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그 역시 음산한 분위기를 품고 있을 것만 같다. 일부러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골랐지만 별로 따뜻하지 않았다. 그나마 덩치 큰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나는 하루의 십분의 일도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갈 때는 느린 걸음을 선택했다. 걸으면서 나는 광장에서 만난 얼굴들을 떠올려보았다. 모두가 흠잡을 만한 얼굴을 가졌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희망적인 인생일 것이다. 내 얼굴은 어때보였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얼굴의 주인인 나조차도 내 얼굴을 본 지 이미 오래였다. 추위 탓인지 허기가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면 고추장에 밥을 비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랍장을 딛고 현관문을 열었다. 따스한 기운이 나를 반겼다. 집 안에 들어선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멍해진 정신을 수습해야했다.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당연히 낯선 등이었고, 낯선 뒷모습이었다. 뒷모습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언 몸에서 땀이 흘렀다.


“지난번에 한 번 왔었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차니까요.”

뒷모습이 말했다.

“일단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고….”

나도 무지막지하게 놀랐다고 말하고 싶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내 것이다.

“책이 많더군요. 그래서 깨우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저도 책을 좋아합니다.”

나는 말없이 뒷모습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겨드랑이 사이에 맺힌 땀방울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뒷모습은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를 나섰다. 그가 드나드는 현관은 내가 드나드는 현관과 달랐다. 버스 앞문이 끼익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뒷모습과 보낸 몇 분 되지 않는 시간이 내게는 며칠은 된 듯 느껴졌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인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궁리해보았지만 이곳보다 편안하고 좋은 곳이 떠오를 리 없었다. 잠시 후 뒷모습이 돌아왔다. 손에 검은 봉지와 음료수 한 통이 들려있었다.

“일단 좀 드시면서.” 뒷모습이 말했다.

김밥, 순대, 떡볶이.

글쎄, 이게 목으로 넘어갈까?

“드시면서 들으시죠.” 뒷모습이 말을 이었다.

“저는 선생님을 이곳에 계속 모시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상황인지는 말씀 안 하셔도 알겠고요.”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모신다니… 나를 모신다니… 나 같은 걸….


뒷모습과의 첫 만남을 마친 그날의 저녁 메뉴는 김밥과 순대와 떡볶이였다. 뒷모습은 가끔 집을 방문했고, 늘 뭔가를 사가지고 왔다. 뒷모습은 내게 자신의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내게 책 목록을 내민 적이 있는데 목록 자체가 한 권의 책이라고 해도 될 만큼 두꺼웠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체크해두면 다음 방문 때 체크한 책들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이니 부담 없이 읽고 반납할 날짜만 지켜달라고 했다. 나는 뒷모습 덕분에 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현대철학과 소설을 주로 체크했다. 현대철학은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읽는 데서 재미를 발견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읽어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책읽기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육신의 식량과 영혼의 식량이 모두 해결되어있었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나는 뒷모습을 처음 본 날을 ‘안식의 날’로 정했다. 집에는 달력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날짜와 요일을 알 수 없는 ‘안식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