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1. 3. 09:49



꿈 | 다리


다리는 8자 모양으로 지어져있었다.

바람의 충격을 버텨낼 수 있는 새로운 공법이라고 했다.

다리를 보는 순간 ‘이건 불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광풍 같은 바닷바람에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다리라면

어떤 모양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다리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매일 다른 모양, 다른 색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다리를 다녀갔다.

다리가 열리고 차들이 다니려면 수십 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다리가 언제 열릴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서,

나는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첫 번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리의 길이는 10킬로미터가 넘었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다리를 건너기에 좋은 날을 기다려야 했다.


태양이 뜨거웠다.

강한 햇볕이 빛에 노출된 모든 사물의 색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낮에는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만큼 뜨거웠지만,

밤에는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웠다.

학계에서는 이미 국가 전체의 사막화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기후 변화에 따라 많은 직업이 사라졌고, 새로운 많은 직업이 생겨났다.

마트의 과일 코너에서는 낯익은 과일들 대신 낯선 과일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었다.


고맙게도 달밤이다.

게다가 보름달이다.

나는 배낭에 옷가지와 도시락과 물통과 랜턴을 챙겨 넣었다.

만약을 대비해 룸메이트에게 짧은 메모를 남겼다.


다리 입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조밀하게 세워져있었다.

달은 휘영청 밝았고, 미친 듯 바람이 불었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몸이 뒤돌아서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오늘밤이다.

나는 오늘밤에 이 다리를 건넌다.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시작부터 난조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면 숨 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현실감 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맹목적이지 않으면 이 다리를 건널 수 없다.

바람이 분노한다면 나는 바람보다 더 성을 내야한다.’

바람은 나를 밀어내려 하지만 사실 바람에게는 악의가 없다.

바람을 이겨내야 하는 인간만 분에 사로잡힐 뿐이다.

인간 따위를 이겨봐야 바람에게는 득 될 게 없는 것이다.

이곳이 만약 바람 없는 동굴이었다면 걷기에 더 편했을까.

10킬로미터 거리의 동굴이라면 아마 폐쇄공포에 눌려 숨 쉬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무겁지 않은 배낭이 바윗덩어리나 되는 듯 무거웠다.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얼굴을 떼어내 주머니 안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종이 한 장이 눈가를 베고 지나갔다.

종이가 날아간 방향을 노려보았지만 종이의 꼬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룸메이트에게 물었다.

“최초의 인간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룸메이트가 대답했다.

“글쎄. 아무런 기분도 아닐 것 같은데? 최초의 존재라는 건 대부분 자신이 최초라는 걸 모르니까.”


저 멀리 중앙선이 만나는 지점이 보였다.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걷기가 중노동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실감했다.

이 짓을 왜 하고 있을까 라는 잡념을 버리려고 애썼다.

느리지만 나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다리의 양쪽 차선이 만나는 곳에는 중앙분리대 없이 중앙선만 선명히 그어져있었다.

나는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방풍벽 아래에 앉아서 듣는 바람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괴성 같았다.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을 수 있는 소리.

그런 소리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다리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물을 마셨다.

허기가 느껴졌지만 도시락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 쉬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마스크를 끌어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에 모래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모래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방향을 바꾼 바람이 정면에서 얼굴을 난타했다.

바람을 향해 등을 돌렸다.

뒤로 걸어도 모래에 살갗이 긁히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밀리는 배낭의 무게는 이미 충분히 무거웠지만,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배낭을 더 무겁게 꾸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우비를 입고 나왔다면 아마 모래에 쓸려 걸레가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들었다.

대기는 이미 먼지에 점령당했고,

달은 위치만 겨우 알아볼 수 정도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맞바람이 부딪치면서 회오리가 일었다.

바람이 도는 것이 느껴질 때면 나는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회오리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다리의 나머지 절반을 건너는 데는 두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추위와 먼지에 시달린 눈이 곧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시큰거렸다.

걸어온 거리를 가늠하는 것을 포기할 무렵,

육중한 쇳덩어리가 몸을 가로막았다.

바리케이드였다.

다리를 건넌 것이다.


몸은 풀이라도 쑤어놓은 것처럼 맥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바리케이드 앞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잠들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틀렸다.

최초의 인간이 된 기분은 아무 기분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인간이 된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육신이 녹아내릴 것 같은 피로감이었다.

모래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쉴 곳을 찾아야 했으므로

나는 그대로 앉아 달빛이 길을 밝힐 때를 기다렸다.

온 얼굴이 쓰라렸지만 종이에 베인 상처가 가장 쓰라렸다.

눈을 감고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다리는 걷는 내내 단 한 번의 작은 미동도 없었다.

광풍 가운데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다리.

다리를 건너고 나니 내가 다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주위가 환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모양이다.

눈을 뜬다.

밝은 달빛 아래에 온 세상이 환하다.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내가 해낸 일이 피부로 느껴진다.

뭔가 묵직한 덩어리가 가슴을 타고 올라온다.

눈두덩이 뜨거워진다.

모래바람을 맞을 때처럼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제야 내가 해낸 일이 피부로 느껴진다.

눈물이 흐르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이 뜨거워진다.


나는,

내가 출발했던 자리에 앉아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앉아있다.

어디쯤에서 돌아온 건지조차 알 수 없다.

나는 결국 최초의 인간이 되지 못했다.

잠시 후 나는,

배낭을 메고 일어서서 엉덩이를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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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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