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1. 4. 12:27



매일 달라지는 꿈의 내용은 나에게 꿈이 흐르는 길의 물리적 변화에 대해 가르친다. 나는 왼쪽으로 누워 잘 때와 오른쪽으로 누워 잘 때의 꿈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왼쪽으로 누우면 악몽이나 유쾌하지 않은 꿈을 꿀 때가 많다. 예를 들면,



꿈 | 뷔페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뷔페에 간다.

꽤 괜찮은 뷔페라고 아내가 자랑한다.

나는, ‘꽤 괜찮은 뷔페라면 웨딩홀 수준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뷔페겠지’ 라고 생각한다.

둘을 먼저 올려 보내놓고, 나는 주차장 한쪽에 서서 천천히 담배 한 모금을 즐긴다.

아내와 딸아이는 지금쯤 접시를 집어 들었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담배 맛이 좋다.

담배가 다 타들어갈 무렵,

나는 내가 가야할 뷔페가 몇 층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어려울 것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면 층별 안내문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필터가 타들어갈 정도로 마지막 한 모금까지 정성껏 들이마신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두리번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보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음… 뭔가 이상한 구조의 건물이다.

미로처럼 복잡한 건물 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3층까지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3층까지 올라간다.

아차, 식당이 몇 층인지도 모르면서 3층까지 올라왔구나.

나는 주변을 살피며 식당이 있는 층을 알아내려 애쓴다.

시야가 닿는 곳을 둘러보지만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저 멀리 모서리 진 구석에 공사 장비들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아직 3층은 용도가 불분명하거나 특정 용도를 위해 단장 중인 것 같다.

때마침 신기하게도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마치 호텔 프론트 직원처럼 말쑥한 차림의 아가씨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이곳은 아직 공사 중이예요.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일단 그녀는 헤매고 있는 내게 한 줄기 빛이다.

그녀에게 대답한다. “식당을 찾고 있습니다. 뷔페식당이요.”

“아…” 그녀는 마치 식당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찾아주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 건물에는 그런 식당이 없어요.

아마도 옆 건물의 식당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옆 건물과 이 건물은 주인이 같아서 건물과 건물을 연결해놓았답니다.

4층과 9층에 연결통로가 있는데 4층은 걸어서 올라가셔야 해요.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나는 그녀를 따라 공사 중인 3층의 대각선을 가로지르고,

먼지 냄새에 몇 번 기침을 하고,

비상계단에 이르러 특히나 더욱 먼지로 가득한 계단을 올라 4층에 도착한다.

우리는 3층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대각선을 가로질러 다음 건물과 연결된 통로에 닿는다.

“이곳은 아직 개방된 공간이 아니어서 바깥쪽에서는 문을 열 수 없답니다.”

그녀의 두 번째 미소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두 번째 본 그녀의 미소는 내게 시장 통의 잘 삶긴 돼지머리를 연상시킨다.

마치 잘 그려놓은 돼지의 미소를 프린트해서 얼굴에 붙여둔 것 같은 표정이다.

혹독하게 훈련받은 미소다.

우리는 연결통로를 지나 옆 건물 4층에 도착한다.

여자가 말한다.

“이 건물 2층에 식당이 있어요. 그럼, 건투를 빌어요.”

여자는 예의 그 돼지머리 미소를 지으며 돌아간다.

이 건물의 구조는 옆 건물과 동일하다.

나는 3층까지는 계단으로, 그리고 2층까지 다시 계단으로.


예상대로 아내와 딸의 테이블에는 이미 빈 접시 몇 장이 쌓여있다.

메뉴는 보통의 뷔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 후식 메뉴가 종류별로 정리되어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

아니, 특이한 메뉴.

도가니탕.

마치 어제 사서 오늘 처음 꺼내 쓴 것처럼 번들거리는 무쇠 솥에서

소의 도가니가 뽀얗게 끓고 있다.

솥 주변으로 도가니를 끓이는 구수한 육수향이 진동한다.

솥의 지름은 대략 3미터쯤, 깊이도 최소한 50센티는 넘을 것 같다.

도가니탕이 이 뷔페의 주 메뉴인 모양이다.

뷔페식당에서 도가니탕이 주 메뉴라니…

뭔가 낯설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환하다.

이미 스무 명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나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사람들은 냉면 대접만한 그릇에 도가니를 한가득 퍼 담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온다.

나 역시 양껏 퍼 담을 생각이다.

그때 별안간 낚시 장화를 신은 꼬마가 나타난다.

한 손에는 삽을 들었다.

무얼 하려는 것일까.

꼬마는 가볍게 뛰어올라 도가니 솥 안으로 들어간다. 첨벙~!

꼬마의 얼굴은 육개장 국물처럼 붉게 상기되어있다.

꼬마는 양손으로 삽을 잡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어깨에 힘을 준다.

말을 걸 분위기는 아니지만 나는 꼬마에게 말을 건다.

“도가니를 퍼줄 생각이라면, 이제 내 차례이기는 한데….”

꼬마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삽을 고쳐 잡는다.

곧 꼬마는 미친놈처럼 도가니를 퍼내기 시작한다.

솥 사방팔방으로 마구 도가니를 뿌린다.

홀 바닥이 도가니와 도가니 육수로 범벅이 된다.

메뉴를 고르러 솥 주변을 걷고 있던 사람들이 육수기름에 젖은 바닥 위로 미끄러져 넘어진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꼬마의 미친 짓을 구경하러 솥 주위로 모여든다.

모여든 사람들도 이리저리 자빠진다.

이건 마치 엉망으로 설계된 도미노 게임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떼거지로 자빠진다.

나만 혼자 솥 앞에 서있다.

다들 자빠진다.

나 혼자 서있다.



내 악몽이라는 것은 이런 식이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없고, 먹고 싶은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한다. 이것이 내 악몽의 얼굴이다. 원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지만 가질 수도, 먹을 수도 없다. 꿈은 나를 잠재우지 않는다. 나는 긴 꿈을 꾸고 충혈 된 눈으로 깨어난다. 누웠고, 눈을 감았고, 꿈을 꾸었고, 깨어났으나, 잠을 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오른쪽으로 누워 잠을 청한다. 즐거운 꿈은 아니지만 적어도 악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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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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