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1. 13. 09:42



손님


피부과 선생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구역에 가려면 오래 걸어야했지만 따로 날을 선택하지 않고 매일 길을 나섰다. 선생의 자취를 찾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인연이 심술을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선생이 작정하고 은둔 중인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길 위의 사람들이 이동하는 동선에는 애초부터 질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수소문은 수소문으로 그쳤다. 만약 선생이 나를 찾으려 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의 거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약사 친구의 권유대로 길 생활을 청산했는지도 모른다. 약사 친구라면 충분히 그를 살려낼 재간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인생을 거머쥐고 있는 자는 선생 자신이었으므로 완강한 그의 고집을 떠올려보면 길을 떠났을 가능성보다는 보금자리를 옮겼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저 선생의 나날들이 평화롭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외출을 그만두고 독서에 집중했다. 함바식당 아주머니는 이제 조금씩 고기반찬을 싸주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남긴 잔반을 모아주는 정도의 정성이었지만 내게는 하해와도 같은 은혜였다. 냉장고에서 오래 묵어 손님상에 낼 수 없는 상추 등의 쌈 채소도 내 몫이었다. 잘 먹고 잘 지낼수록 선생에 대한 생각이 잦아졌다. 선생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바라고,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사람들과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을까. 선생은 깊은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는 길 위의 사람이었다. 물 위에 뜬 영혼으로 바위처럼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인격이었다. 거처를 옮겼다면 과연 그곳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내가 아는 바대로라면 선생은 아늑한 동굴보다는 탁 트인 광야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대로. 대지. 공터… 먹는 문제 때문에라도 도시를 등지고 촌으로 내려갔을 리는 없다.


쓸데없이 긴 공상으로 밤을 지새우고 늦게 일어난 날이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누군가가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놀랍게도 선생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아니, 선생님.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얼른 선생을 버스 안으로 모셨다. 얼굴은 말랐지만 맑아보였다. 선생은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여행지는 아내의 사고현장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당연한 결론인데 염두에도 두지 못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선생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사고현장이 어디라고는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내와 대화를 좀 나눴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내가 길에서 사는 걸 원치 않더군.” 선생은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내가 보통 사람들처럼 살기를 원해. 나는 길이 좋다고 했네만.”

“저도 그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간 더 이쪽 세상에 있기로 했네. 대신 오래있지는 않기로.”

나는 선생에게 버스에서 함께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은 거절했다. 길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온전히 길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설득할 수 없었다. 대신 몹시 추운 날에는 버스에 오기로 했다.

“책을 많이 모았군.”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놓는 집이 거의 없어서요.”

“몸 걱정을 먼저 하게.”

“집이 생긴 후로는 잘 먹고 있습니다. 행운의 스쿨버스지요.”

나는 선생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버스를 발견한 이야기, 운동장 풍경, 금연, 비 내리는 날의 행복, 함바집 아주머니, 버스기사인 뒷모습을 만난 이야기까지. 선생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담배를 태웠다.

“누군가 자네를 돕고 있는 것 같군.”

“저는 그저 비를 따라왔을 뿐인데… 신기한 일입니다.”

선생도 지난 시간을 이야기해주었다. 사고현장 가까운 곳에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는 이야기, 오랜만에 아파트에서 자려니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는 이야기, 자다가 인부들에게 들킨 이야기, 그 인연으로 현장에 취직한 이야기, 배달 밥이 맛있었다는 이야기… 우리는 오랜만에 고추장 안주에 술도 한 잔 나눴다. 그날 밤, 선생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나는 바닥에 박스를 깔고 잤다.




꿈 | 도서관


여자는 도서관 입구에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여자가 선 자리는 경계가 매우 애매해서 도서관 구역 안에 있는 것도,

도서관 구역 밖에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도서관은 부지 전체가 금연이었다.

여자는 나와 몇 번 눈이 마주쳤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어디선가 딱히 본 얼굴도 아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다.

창백한 얼굴에 가늘고 긴 몸.

여자의 표정은 살짝 긴장한 듯 보이면서도 경계의 빛을 띠지 않았다.

여자는 느린 호흡으로 담배를 즐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담배 한 개비와 불을 얻어내는 것은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를 향해 걸어간 후, 여자 앞에 서서, 여자에게 말을 건네면 된다.

쉽다.

하지만 여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늦가을,

가진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 가꾸었던

이파리들을 모두 낙엽으로 잃고,

떨어진 낙엽이 모두 가루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뿌리로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가

죽은 척 겨우내 온몸으로 흡수한 뒤 이듬해 봄에 토해내듯

다시 녹색으로 물드는 나무처럼,

그녀는 말라 죽은 척하는 산 생명체가 가진 모호한 생명의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나는 잠시 움츠러들었다.

여자에게 다가가는 동안 여자는 두려움 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경계하지 않는 눈동자.

이 정도면 가능성이 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여자를 향해 걸었다.

여자의 왼손에는 책이 들려있고,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멸하지 않는 자’라고 또박또박 적혀있다.

이 여자는 책을 읽는 여자다.

아니면 그림을 보듯 책을 감상하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내게 아주 익숙했다.

외울 만큼 반복해서 읽었던 책이다.

흰 표지에 낙인처럼 박힌 굵은 제목만으로도 나는 긴 시간 겪은

폐쇄의 고통을 잊지 못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대번에 그 책을 알아보았다.

이 책이 그림이라면 이 책은 난해한 그림이고,

난해함 속에 숨어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고,

그림이랄 수 있는 것의 모양을 가진 어떤 형상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고통스러워지고야 마는,

게다가 그 고통이 오래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책이었다.

수백 년 쌓인 먼지도 건드리지 않으면 날리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세월만큼의 먼지 덩어리인 사람과, 그런 사람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바람 같은 책.

어떤 짐승이든 짐승들 사이에는 안전거리라는 게 있다.

적이든 친구든 혹은 무생물이거나 다른 종의 생물이든 간에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 너도 안녕하고, 나도 안녕하다 하는 거리.

구멍가게 주인에게 밟혀 죽은 쥐처럼 거리유지에 실패하면,

죽는다.

추격자들과의 거리유지에 성공하면,

산다.

거리가 아주 가까워진 후에도 여자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익숙한 장면에 길들여진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가끔은 말입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가끔은, 담배 한 대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내게 담배 한 대를 건넸다.

“모자라기 때문에 자꾸 찾게 되기도 하지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여자가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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