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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32 . 운전수 . 꿈-해무, 젖은 바다 위의 댄서



운전수


뒷모습은 정식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뒷모습의 개인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뒷모습은 자신을 게으르고 부유한 사람이라고 했다. 게으르기 때문에 스쿨버스 기사 일을 선택했다고 했다. 보수도 적고 하루에 두 번 출근하는 것도 번거로웠지만 하루를 넉넉히 쓸 수 있어서 좋고, 쓸 만큼의 돈은 이미 벌어두었기 때문에 보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뒷모습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는 일할 때와 식사시간 외에는 주로 잠을 자고, 가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뒷모습은 대형화물차 운전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차주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그냥’ 기사였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3년쯤 지나자 25톤짜리 중고트럭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돈벌이가 좋았다. 작은 집도 한 채 샀고, 가재도구와 가구와 가전제품도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 일은 점점 바빠졌다. 시간에 쫓기며 몇 년을 지내다보니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고, 돈벌이도 지겨워졌다. 통장에는 아끼기만 하면 평생 쓸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모여 있었다. 트럭을 팔고 새 일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는 트럭을 팔기 전에 여행을 떠났다. 행선지는 정하지 않았다. 막연히 강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바다와 강을 두루 다녔다. 강가의 자갈밭에 차를 세워두고 강물 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강가를 발견하면 며칠씩 묵으며 강을 바라보았다. 바다와 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장어 잡이, 우어 잡이, 은어 잡이, 추어 잡이, 재첩 잡이, 그리고 여러 뱃사람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다의 일출과 해거름과 심연의 쪽빛에 날염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새로 시작하는 인생에 질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자연과 사람의 공존에 필요한 지식과, 자연에게 지켜야 할 예의와,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돌봐줘야만 결실을 내준다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쳤다. 그것은 육지나 바다나 인생을 막론하고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 진리였다. 뒷모습은 흡수력이 좋았고, 배움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앞에 각자가 간직한 삶의 비밀들을 풀어놓았다. 그는 척 보기에도 정직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배움의 달콤함 덕에 그의 여정은 한없이 길어졌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일에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차에서 내린 짐은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떠나기 전보다 더욱 간소한 인생이 되어있었다. 시간도 많이 흘렀다. 떠나기 전에는 일을 그만두고 검소하게 살며 인생을 마감할 계획이었으나 돌아오고 나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대신 전처럼 일의 종이 되어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한가한 일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뒷모습의 이야기를 며칠에 걸쳐 들어야했다. 선생은 그의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버스를 떠나지 않았다. 선생과 뒷모습이 번갈아가며 밥을 샀다. 선생은 그의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도 오래 버스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식탁에는 수공예적인 번거로움이 자리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 두 번 음식을 배달시켰다. 우리는 가족이라도 된 듯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꿈 | 해무


이른 새벽에 사구로 나갔다.

절기상 가장 썰물이 깊어질 시간이다.

예상대로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했다.

광활하게 트인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찬 바닷물 위를 걷고 싶었다.

바다에 닿으려면 오백 미터는 족히 걸어야 했다.

걸었다.

바다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두 개의 수평선 중 아래쪽에 있던 수평선에 닿았다.

수면 위로 부드러운 직물의 감촉을 지닌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곧 사방이 안개로 덮일 것이고,

해가 정수리에 직각으로 꽂히기 전에 자욱했던 물방울들은 사라질 것이다.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가방끈에 묶었다.

바다 위를 걸었다.

옷이 조금씩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체온이 떨어지면 민박으로 돌아가야 한다.

깊은 가을,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는 상쾌하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안개가 자욱해지면서 바다와 모래사장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걷기에는 더 좋았다.

발목을 적시던 바닷물이 어느새 종아리에 차올랐다.

‘조금만 더 걷자, 그리고 뒤돌아서자.’

시야를 식별할 수 없는 바다는 꿈처럼 몽롱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서야

허벅지에 닿은 바닷물을 알아챘다.

‘너무 멀리 왔다.’

돌아섰다.

바다를 등졌지만 정말 등 뒤에 바다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걸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허벅지를 감싼 바닷물은 그대로였다.

계속 걸었다.

‘길을 잃으면 안 된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옷도 조금씩 무거워졌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육지를 향해 걷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방향은 알 수 없었지만 돌아선 그대로 끝없이 걸었다.

이십 분쯤 걸었을까?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체온은 계속 떨어져 갔지만 이제 곧 민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기분이 차분해졌다.

육지가 가까워지면서 안개도 조금씩 옅어져 갔다.

발바닥이 모래에 닿았다.

젖은 모래가 끝나고 마른 모래사장에 이르자 발바닥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운동화를 신었다.

해변의 안개는 아직 깊지 않았다.

새벽의 한기가 가느다란 주사 바늘처럼 살갗에 구멍을 냈다.

옷은 방금 물에서 건져낸 듯 무겁게 젖어있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살로 이어진 길을 따라 물방울이 볼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마을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사구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일직선으로 돌아 나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조금 더 걸어야 했다.

5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옅은 안개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는 나무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바짝 마른 거인이 팔을 휘두르는 모양 같기도 하고,

거대한 검은 독수리가 홰치는 모양 같기도 했다.

지척에 이르러서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여자였다.

여자는 사구의 모래를 손으로 긁어 한 움큼 움켜쥐고 한껏 팔을 뻗어 허공에 흩뿌렸다.

한 맺힌 영혼의 절규를 닮은 참혹한 몸놀림.

그렇지만 대본이라도 있는 듯 규칙적인 절규다.

머리가 길었다. 검은 머리.

그녀는 퍼포먼스를 마치고 안개에 젖은 모래사장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매끈한 발등에 투박한 발가락을 가졌다.

안개 너머로 작은 파도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다.

검정색 니트, 검은 색 머리칼.

확연히 대조되는 흰색의 얼굴.

‘왜 맨발일까?’

그녀가 가진 몸의 실루엣은 차분한 우울함을 풍겼다.

지나치게 회화적인 모습이었다.

깊고 음울한 그림.

나는 소리 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발걸음마저 안개에 젖은 듯 무거웠다.

마을에서 사구로 들어오는 입구가 보였다.

민박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야지…

뜨거운 커피도 한 잔 마셔야지…

등 뒤로부터 목소리가 있었다.

여자였다.

젖은 낙엽처럼 차분한 음성이었다.

잠시 그녀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저도 돌아가야 해서….”

그녀와 나는 느린 걸음으로 해변을 빠져 나와 각자의 숙소를 향해 걸었다.

길가를 따라 흩뿌리듯 피어있는 코스모스의 색이 선명했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