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1. 28. 13:28


메모

나는 늘 꿈속에서 메모를 한다. 한 순간, 한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꿈속의 장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현실 속의 나 역시 메모를 한다.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 속의 아름답고 정지된 풍경과, 눈동자를 파고들어와 마음을 어지럽히고 혼돈에 빠뜨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쉬지 않고 메모를 하고, 가끔 낯선 풍경에 둘러싸인다. 이제껏 밟아본 적 없는 미지의 대지. 때로 그곳은 빛으로 가득 찬 천국이기도 하고, 지옥 같은 불바다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꿈 | 사막

사막이다.

서걱거리는 모래가 지배하는 불모의 사막이 아니다.

굳이 떠나야 한다면, 다시 돌아오고 싶은 사막이다.

심지어는, 얼굴과 피부조차 곱고 아름다운 사막이다.

이 땅은 과연 어떤 생명에게까지 삶을 허락할 것인지,

죽음의 이유에 대해 어디까지 관대할 것인지,

삶에 대해. 혹은 죽음에 대해. 묵묵히 고요한 사막이다.

질문을,

초록의 바람과 어리고 여린 풀로 대답하는,

아름다운 사막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아름다운 사막은 아니다.

이 사막은, 오직 이 사막의 주인들에게만 삶을 허락하는 폐쇄적이고 몰인정한 사막이다.

그러나 일단 이 사막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에게는,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한없이 포근하고 따스하고 풍요로운 사막이다.

가늘고 키 작은 풀로 뒤덮인 이 녹색사막은,

먼 길을 걸어야하는 자에게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고,

끼니를 때우지 않아도 굶주림을 느끼게 하지 않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게 하지 않는다.

살가죽을 어루만지는 바람에는 위로가 담겨있고,

바람을 따라 흐르는 구름은 자유를 이야기한다.

바람은 늘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바람이 달리는 길을 따라 구름이 자유롭게 번져 흐른다.

서쪽에서 날아온 바람은,

북동쪽으로,

남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흘러 사라진다.

바람은 드물게 방향을 바꾸지만,

신기하게도 항상,

우리가 걷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불어온다.

바람은,

안아주듯 몸을 휘감고,

팔을 타고 내려와,

손등을 어루만지고,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흘러,

겨드랑이로 빠져나간다.

사막은 모든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

소리라면 유일하게 바람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흔들림.

누군가를 만나도 우리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대화는 굳이 소리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사막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아낀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주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가끔 아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종종 가족을 만난다.

누구를 만나든 반갑고,

모든 얼굴이 반갑다.

우리는 어느 곳에든 앉아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그리고 이승에서 못 나눈 이야기들을 나눈다.

역시 소리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하염없이 걷고,

하염없이 만나고,

하염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곳은,

녹색으로 충만한 바람의 사막이다.

바람이 거대한 그림이 되는 사막이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그곳이 천국일 거라고 믿었다. 가족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이생에서 못 나눈 이야기들을 나누고, 끝없이 펼쳐진 녹색사막을 함께 걷는 곳. 그토록 사랑스러운 바람을 가진 사막,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날 수 있고, 솜털처럼 흰 구름들이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곳. 그러나 꿈의 내용이 천국이었든 지옥이었든 간에, 잠에서 깨고 나면 나는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내가 속한 세계는 차가운 시멘트바닥과 고층건물 사이로 몰아치는 광풍과, 밥 먹듯 굶주리고 갈증에 목마른 세계였기에 나는 꿈을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상상만으로 백 퍼센트 회귀할 수 있는 땅은 아니었으나, 나는 메모를 읽으며 나의 세계에서도 그곳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것은 내게 큰 위로였다. 하지만 늘 좋은 꿈만 꾸는 것은 아니었다. 꿈이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다양했고, 가끔은 꿈 스스로가 무작위로 뽑아낸 짧거나 긴 한 편의 우울한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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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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