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7. 11. 23. 22:53

감옥


나는 내 손목의 맥박이 뛰는 것을 본다. 나는 믿을 수 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죽고 사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운명을 온전히 내 것이라고, 내 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슬프다. 사람 숨. 살가죽보다 질긴 숨.

결국 나는 깊은 잠에 빠지기로 했다. 자살을 위한 것은 아니다. 죽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처음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죽을 수 없다. 잘 죽어지지 않는다. 정해진 수명이 차기 전에 죽을 수 있으려면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조금 더 즐겁게 살려고 애쓰거나, 고통스럽더라도 이어가거나… 아무튼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짐승의 숙명이고 질곡이다. 그리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잠이었다. 잠… 아주 긴 잠. 잠으로 세월을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간들을 죽여 가는 것이다. 내가 죽지 못하는 대신 시간을 죽여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죽여 가고, 그렇게 한 시간 한 시간 죽어가는 것이다. 다가오는 순서대로 이번 덩어리의 시간을 죽이고, 다음 덩어리의 시간을 죽이고, 그 다음에 버티고 서있는 덩어리의 시간을 죽이고. 몸과 정신이 환하게 깨어나 더 이상 잠으로 시간을 죽일 수 없을 때까지 잠드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죄질을 알고부터 모든 사물과 모든 환경과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열려있을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하였다. 세상에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다고 믿었고, 그러므로 나보다 더럽고 위험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가끔 룰을 깨야만 했다.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할 지 모르는 채 모든 관계를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독이었지만 달콤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단맛을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다. 단맛. 거부할 수 없는 단맛.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단맛 뒤에 남는 맛이다. 이런 단맛 뒤에는 이런 쓴맛이, 이런 단맛 뒤에는 이런 씁쓸한 맛이 남는다는 식의 단맛에 대한 바이블이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어떤 미래에 대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세상 어디에도 그런 류의 바이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 맛을 보고 그리고 경험으로 깨닫는다. 몸이 썩고 마음이 썩고 마음의 뿌리마저 썩어버린 후에야 어떤 단맛은 맛보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모든 것이 회복되지 못할 만큼 고장나버리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그것뿐이다. 포기하지 않은 것. 자랑할 만큼 뿌듯한 건 아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영혼의 뿌리가 썩은 후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희망이 남은 탓도, 휴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탓도, 내 심장이 아닌 누군가의 심장을 빌려 생존한 탓도 아니다. 나는 단지 포기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태어난 인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미칠 수 없었다. 모두가 미쳐버려서 미친 게 오히려 정상이 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나만은 미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인생이었다. 단지 그뿐이다. 생의 모든 단맛과 쓴맛을 보되 살아남도록 운명 지어진 인간. 그게 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과거를 참회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나는 미치도록 후회했고, 죽고 싶도록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외면했다. 후회하지 못하도록. 용서받지 못하도록. 그게 나를 둘러싼 세상이었다.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왼쪽. 오른쪽. 뒤를 돌아봐도 그저 잘 마른 벽.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살리기 위한 세월을 살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죽이기 위한 세월을 살기도 하는 것이다. 언젠가 손에 닿을 거라 믿고 살았던 하늘이 무너져 내린 후의 삶처럼, 기나긴 자살을 산 자의 얼굴로 이어가야 하는 인생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누군가 나를 가두려고 한 짓이라면 제대로 가두었다.






꿈 | 항해


긴 항해였다.

몇 끼니를 배 안에서 먹어치웠는지 계산조차 되지 않는 세월이 흘렀다.

선장도, 선원도, 배를 얻어 탄 사람들도 모두 지쳐있었다.

다행히 큰 싸움은 없었다.

먹을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연료도 충분했다.

추위는 견딜만했지만,

바람은 칼끝처럼 매서웠다.

사람들은 외출하지 않았다.

모두가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거나,

혹은 영적인 목마름이었다.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내 모두 벙어리가 된 듯 침묵을 지켰다.

바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항해의 시작 무렵에는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조타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감상했다.

비 구경을 위해 끝내는 갑판으로 이어지는 현관 앞에 차양을 치기까지 했다.

긴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더 이상 비가 내릴 수 없는 바다 위에 닿았다.

마지막 비를 보던 날이 떠오른다.

나는 심한 몸살에 시달리고 있었다.

며칠째 선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뜨거운 차만 축내고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무인가?

수평선이 흐릿해지고 바다가 회색으로 얼굴빛을 바꾸었다.

비였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촘촘히 쏟아지고 있었다.

비는 우리의 항로를 따라오기라도 하듯 수일에 걸쳐 바다와 배를 적셨다.

몸살이 낫고 드디어 갑판에 나설 수 있게 된 날에도 비가 내렸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오랜만에 비로 몸을 적시기 위해 갑판으로 나갔다.

차가운 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한의 시작.

겨우 나은 몸을 다시 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선실로 돌아가기 위해 긴 갑판을 걷기 시작했다.

젖은 갑판을 밟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시야가 밝아지며 갑판 바닥의 문양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눈으로 변한 것이다.

배는 북향을 이어갔고, 그날 이후로 나는 비를 맞을 수 없었다.


나는 갑판 머리에 서서 뱃머리를 들이받고 옆으로 물러나는 빙하의 파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투 깃 사이로 얼음덩이 같은 바람조각이 스며들었다.

항해를 시작하기 전 머물렀던 해변의 풍경이 떠올랐다.

인적이 드물었다.

햇살이 따스했다.

바람은 봄의 그것처럼 부드러웠다.

바다를 향해 서있는 망루는 비어있었다.

종종 눈에 띄는 사람들의 걸음은 마치 알을 낳기 위해 상륙하는 거북이처럼 느긋했다.

모래사장에는 서너 개의 파라솔이 꽂혀있었지만 태양을 피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게 될지 예측하지 못했다.

미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지능이 하늘을 뚫을 만큼 높아도 결코 알 수 없는 세계. 미래.

산책을 마친 한 남녀가 바다를 향해 섰다.

둘은 곧 모래밭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풍경 속에 시간이 멈춤.

두 사람은 오래 침묵을 지켰다.

가끔 산들바람이 살을 감싸고 흘렀다.

파도는 발목 높이를 넘기지 않았다.

고요는 깊었다.

귀를 기울이면 연한 바람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했다.

평화라는 것은 어쩌면 소리 없는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는 호수인 듯 잔잔했다.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 길게 그어진 수평선과,

저 멀리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부표만이 바다가 바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바다의 얼굴은 달랐다.

파도는 해변으로 깊게 밀려들었고, 바람은 차게 식었다.

해 아래에서보다 더 인적이 드물었다.

밤의 해변은 찬바람과 깊은 파도의 세상이었고,

특이하게도 마음의 온도를 식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밤바다는 다른 무엇보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어두운 새벽과, 투명한 아침과, 포근한 오후와, 차가운 밤의 바다,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늦은 새벽의 바다는 마치 완벽한 한 장의 흑백사진 같았다.

가로등 불빛조차도 색을 잃고 옅은 회색으로 변했다.

전신주에 걸린 전선들이 이쪽 하늘과 저쪽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파도에 잠기고 솟아오르기를 반복하며 검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이 짙은 보라색으로 바뀌고,

시간의 틈새로 푸른빛이 얼굴을 내밀면,

흑백사진이 사라지고 색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수면 아래에 차분히 깔려있던 의식이 이슬에 젖은 이파리들처럼 생기를 띠고,

몸과 살은 어제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피부를 덧입은 듯 본래의 체온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아침이 오고, 일과가 시작되었다.


항해가 시작된 후 처음 몇 달간은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식단은 매 끼니마다 훌륭했고,

좁은 공간 안에서 정해진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되는 것은 나름 흥분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아는 일이 시들해지고,

긴 항해에 지친 몸이 입맛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모두들 의욕도 함께 잃었다.

무기력은 급기야 생의 이유에까지 손을 뻗쳤고,

대부분 크거나 작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선장과 선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기가 살아났다.

그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재미거리가 있는 것일까?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나를 비롯한 몇몇은 그들이 들떠있는 이유를 몹시 궁금해 했지만,

구태여 묻는 사람도, 일부러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이 드러났고, 답은 하늘에 있었다.

선원들은 밤마다 갑판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 시간을 즐기는 방법이겠거니 했으나,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며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재미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 질문을 던졌다.

일등 항해사는 갑판 바닥에 일인용 매트리스를 깔고,

두꺼운 침낭 속에 몸을 누인 채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두 콧구멍은 규칙적으로 길고 풍성한 증기를 내뿜었다.

“알고 싶소?”

“물론입니다.”

“긴 항해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 특히 극북이나 극남을 향해 가는 항해는 더욱 그렇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추운 곳만 다니는 뱃사람들에게 무슨 낙이 있을 것 같소?” 그가 물었다.

“글쎄요. 짐작조차 안 되는걸요.”

“이런 항해는 우리에게도 고되오. 그러나 확실한 즐거움이 한 가지 있지.”

항해사는 무언가 크고 행복한 비밀을 가진 듯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소.”

뜻밖의 대답이었다. 기다리는 즐거움이라…

“무엇을 기다립니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

바다도, 수평선도, 구름도, 비도,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글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마 세상에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아름다울 거요.”

대화는 퍼즐처럼 난해하게 이어졌다.

“화려한 아름다움입니까?”

“화려하지. 황홀할 정도로 화려하지. 하지만 소박하기도 해. 그리고 살아있어.”

“생명체라는 말입니까?”

“우리들은 그렇게 믿소.”

살아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생명체라는 설명이다.

항해사의 눈에 피로가 감돌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침낭과 매트리스를 정리하고 선실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내일 또 얘기하지. 안녕히 주무시오.”

“좋은 꿈꾸십시오.”

나 역시 선실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밤이 새도록 항해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썼다.

생명체인지는 모르나 살아있고,

화려하지만 소박하고,

기다림마저 행복할 만큼 아름다운 것.

생각이 깊어질수록 수수께끼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어 갔다.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다니. 게다가 살아있다니.


하늘이 조금씩 색을 벗으며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믐달이 떠올랐다.

달의 선은 칼로 잘라낸 듯 선명했고 공기는 숨쉬기 아까울 만큼 투명했다.

뱃머리에서는 간헐적으로 얼음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를 들이받은 빙하덩어리는 배의 옆구리를 긁으며 후미로 밀려났다.

선원들은 여전히 일과를 마치고 갑판에 누워있기를 즐겼다.

피로에 젖은 그들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

항해사는 끝내 정답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기다리는 것을 나 역시 기다려야했다.


아주 오랜만에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바다는 변함없이 넓었고, 수평선은 여전히 활처럼 휘어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무겁게 깔려있었다.

올록볼록한 거대한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구름이 거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름거울이 오늘처럼 온 하늘을 뒤덮는 날에는

바닥에 누운 채로 땅과 바다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었으면.

그러나 구름은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상에 남아있는 옅은 빛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구름이 대기를 짓누르는 풍경은 보는 이에게 거대한 답답함을 선사했다.

사방이 공기였지만 숨쉬기가 곤란했다.

그렇게 숨을 조여 오는 갑갑함을 즐기고 있을 때,

구름 위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늘의 크기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느리게 꿈틀거리며 자신의 그림자를 구름 위에 뿌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기하게도.

구름을 가리는 그것의 그림자가, 구름보다 밝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용처럼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것의 꼬리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가느다란 그림자가 수평선 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춤을 추듯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넋이라도 잃은 것처럼 멍한 정신으로 오랫동안 춤을 감상했다.

무정형, 무박자의, 일정한 템포도 없는 자유로운 춤이었다.

바람이 거세졌다.

구름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가속도가 붙었다.

몸이 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수평선 끝의 자유로운 춤의 공연은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긴 공연이었다.

머리 위에서 잠시 색이 번득였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회색의 그림자뿐이었다.

꼬리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꼬리의 끝에서 나는 다시 색을 발견했다.

색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지만 어떤 색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파란색 같기도 하고, 녹색 같기도 하고, 보라색 같기도 했다.

꼬리의 움직임이 멈출 무렵,

수평선의 끝에서 흰 깃발이 날아올랐다.

항복의 의미였을까?

그러나 그렇게 거대한 존재가 나에게 항복할 이유가 없었다.

혹은 소리 없이 나를 부르는 사인이었을까?

하지만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깃발은 하염없이 길었고,

바람의 흐름을 따라 고운 나선형을 그리며 배를 향해, 또는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깃발이 뱃머리에 닿을 무렵,

나는 나도 모르게 날아오는 깃발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깃발은 마치 사람이 손을 내밀듯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날카로운 얼음 알갱이들로 가득한 찬 허공을 뚫고 날아온 깃발은 신기하게도 따뜻했다.

나는 마치 신의 손이라도 잡은 듯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진정 신의 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깃발은 날아가기를 멈추지 않았고,

나는 깃발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더욱 세게 깃발을 부여잡았다.

내 머리 위를 날아간 깃발은 이 큰 배의 선미에 닿을 만큼 길었다.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깃발이 내 몸을 당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바람이 나를 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여전히 나는 깃발을 놓지 않았다.

찰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몸은 허공에 떠올랐고,

나는 수백 미터나 되는 흰 깃발의 끝에 매달려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점점 더 멀리…

배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로부터도 멀어지고 있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공기가 따뜻해졌다.

깊은 허공 속에는 얼음조각들이 부유하지 않았다.

모두 녹아버린 것일까?

더 차갑고, 더 날카로워야 할 것들이 이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어두웠으나 밝았다.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올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이런 기분일까?

깃발은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깃발이 이끄는 곳으로 끝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항해가 아니라 비행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나는 선실이나, 갑판이나, 바다나, 빙하조각들이나, 떨어지는 비를 구경하는 일이나,

수평선을 바라보는 일보다 하늘을 나는 일이 더 근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깃발은 계속 날아갔다.

나의 몸도 깃발에 매달려 하늘을 날았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하늘의 모습은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심연, 그것이었다.

나는 이 비행이 멈추지 않기를 기도했다.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세상은 조금씩 작아지고.

나는 멀어지고 있었다.

멀리… 더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하늘의 빛과 색은 깊이를 더해가고,

깃발은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멀어지고 있었다.

멀리… 아주 멀리…

아주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그 순간에,

하늘은 구름의 베일을 벗었고,

소박하고, 아름답고, 거대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 위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생명체가,

대기 중에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 생명체였고, 소박했지만 강렬한 색으로 빛났다.

푸른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붉은색으로.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현란한 춤사위를 이어갔다.

모양을 갖춘 듯 선명하나, 아무런 모양도 아니었고,

어떤 형상을 드러냈다가도,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그것은 빛이자 색이고, 연기이자 바람이었다.

배 위의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입을 벌린 채 빛의 향연에 취해있었다.

선원들은 그 생명체를 ‘오로라’라고 불렀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