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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울트라 쏠티 스토리

[초단편] 나는 언제까지 나인가

나는, 내가 이제 나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의심의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시간 동안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잃었다는 표현은 조금 애매하다. 내버렸다. 내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이 나를 내버렸다. 내 곁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나를 내버렸다. 사람도 없고, 물건도 없고, 부동산도 없고, 동물도 없다. 나에게는 이제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나마저 내가 아닌 것 같다. 내가 나라면 나를 기억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나에게는 나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없다시피 할 지경으로 희미하다. 나는, 나를 기억해내기가 힘들다. 나는 정말 나인가? 내가 정말 나인가? 이게 정말 나라면, 나는 대체 왜 이 지경의 나인가?


남자는 가족여행을 기억해냈다. 바다. 솔숲. 바비큐와 라면. 아이들. 애완견까지. 그런데 결정적인 대목에서 막혔다.

“아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 산책할 때를 떠올려보세요.

“나란히 걷고 있었습니다. 나란히 걷고 있을 땐 얼굴을 잘 안 보지 않습니까?”

- 대화도 없었나요?

“집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내가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 아내 분의 음성은 어떤가요? 어떤 톤인가요? 만약 여러 여자들의 음성이 섞여있다면, 그 중에서 아내 분의 음성을 구분하실 수 있을까요?

“차분한 음성입니다. 중저음쯤? 부드러운 알토 톤의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 좋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애완견 이름이 토니였는데, 토니에게 덩치 큰 친구를 선물하고 싶다고.”

- 덩치 큰 친구라면?

“대형견이죠. 아내는 큰 개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리고, 아파트에서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작은 개를 키웠을 뿐이지요. 아내는 아파트살이를 답답해했습니다.”


가끔. 기억이 나를 다시 찾아와줄 때마다 나는 적잖이 당혹스럽다. 마흔여섯이라는 내 나이가 낯설고, 과거의 기억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 낯설고, 홀로 남은 현실이 낯설다. 나를 방문하는 기억들마저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거의 반세기에 걸친 세월을 불행하게 살아온 셈이다. 내 인생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채 끝나지 않고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왜 해변에 버려진 새알처럼 꼼짝달싹 못하고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있는 것인가? 내 고독의 이유에 대한 퍼즐을 맞춰보려고 계속 애써보지만, 야속하게도 기억은 고독의 시작을 반추하기도 전에 면회를 끝내버린다.


음악이 흐른다. 점심시간이다. 줄을 서야한다.


두 시간 후에 다시 물었을 때, 남자는 자신은 결혼한 기억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자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만38세 되던 해 늦가을부터였다. 현재 가족들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아내와 아이들은 해외로 이민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들의 거취를 쫓을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하다. 이 남자에게는 직계가족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아니면 그의 아내와 아이들처럼 모두 증발했거나.

그에게는 통틀어 약 이십팔억 원 대의 자산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조차 그의 소유가 아니며,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 그의 소유라고 보기 어려운 상태다.

사람은 언제까지 그 사람 자신이며, 한 사람의 소유물은 언제까지 그 한 사람의 소유인가.


- 무엇이 당신을 괴롭힙니까? 저에게는 무슨 이야기든 하셔도 좋습니다. 모든 내용은 백 퍼센트, 영구적 비밀을 보장하니까요.

남자가 물었다. 그는 이 도시 최고의 심리상담가였다.

“단지…, 단지 저는 제가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싶어요.”

여자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여자의 목을 두르고 있는 명품 스카프의 반짝이는 실크가 은은하게 실내등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제가 보기에 당신은 전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 나이에 비해 월등히 젊어 보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니까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오히려 좋은 사람이고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남편을 버리고 도망한 여자예요. 남편의 것을 모두 훔쳐서 그 사람이 찾을 수 없을 이곳까지 숨어들어왔지요.”

- 버렸다는 게 정확한 사실입니까? 당신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얼굴과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의 음성은 지성미로 가득합니다. 누군가를 버리는 것도, 누군가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럴지도 몰라요. 저도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단지…. 그 사람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 두려웠을 뿐이에요. 물론 적은 재산은 아니었지만, 그의 몸을 돌보고 그의 곁을 지키다가 가진 것마저 모조리 탕진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저 제 두려움이…….”

- 당연한 선택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삶은 먹을 수 없는 음식과 같아요. 그런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꼭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편을 외면해야 할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요?

“맞아요. 정말 그래요. 꼭 돈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병이 시작되면서 그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갔어요. 나를 못 알아보는 사람을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가 누군지도,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곁에 남아서 여생을 낭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당연히 전문적인 치료시설의 도움을 받아야 마땅해요.”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표현 중에서 ‘그런 사람’이라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남자는 좀처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온종일 기다려봤으나 헛수고였다. 그 며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와의 만남이 반복될 때마다 시간의 흐름이 끔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마다 정해진 수명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각자의 세계가 붕괴될 어느 한 점과의 만남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나의 모든 것이 당신과 나의 것이 아니게 될지도 모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