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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4 . 이 도시에는 소음이 없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탓이다.

이렇게 지루하고, 따분하고, 골치 아픈 소설을 왜 쓰고 앉아 있는가...?

저도 모릅니다.





*

몸이 얼어서인지 시궁창 같은 카페가 천국처럼 느껴진다. 나는 바 앞에 서서 뜨거운 블랙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카페 안은 마치 아직 덜 죽은 자들을 모아둔 임시 시체안치소 같다. 웨이트리스가 김이 서린 창을 행주로 닦아낸다. 행주를 떼기가 무섭게 닦아낸 자리 위에 다시 김이 서린다. 사람들은 조금씩 부랑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남자들은 수염이 거칠어졌고, 얼굴가죽에는 쪼글쪼글한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여자들은 더 이상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다. 며칠씩 못 씻고 시장 좌판에 앉은 듯 남루한 행색에 동공마저 상한 노른자처럼 풀려 있었다. 나는 가벼운 도수의 술을 한 잔 더 청해 마신 후 방으로 올라왔다. 여정에 지쳐가고 있어야 할 시기에 좁은 방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다스릴 궁리만 하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달갑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찾아온 땅은 나를 환영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그 땅 위를 걷고 있다. 그 땅에서 잠들고,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나는 모험을 위해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원하는 것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찾는 것은, 밟아보지 않은 길과, 낯선 땅과, 새로운 공기와, 잊고 싶은 것을 잊은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일 뿐이다. 평범한 하루, 친구, 일, 잡담, 돈을 벌고 소비하는 일상적인 즐거움이 싫었던 것이 아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잊어야 할 것은 잊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포기해야 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서양속담처럼 두 의자 사이에는 앉을 수 없는 법이라고. 나는 발코니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혹은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사막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지금 행복할까. 그들은 물질적 풍요와 향락이 아니어도, 매일이 삶을 위협하는 위기여도, 늘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결핍과 위험 속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가진 행복의 비밀을 알고 싶었다. 그 비밀을 만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들이 가진 행복의 열쇠를 그들의 땅에서 건져내어 다른 세상의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행복을 찾는 사람들 모두를 그들의 땅으로 데려갈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비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사막에 닿는 길은 아직 멀다.

이곳에는 소음이 없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탓이다. 도무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이는 저 사람들이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이 항구에 건넬 작별인사일 것이다. 언제쯤 이 침묵의 무덤이 열릴까. 언어가 숨을 거둔 공간은 진공상태의 전구 속처럼 고요하고 지루하다. 방 안의 풍경은 기다림만큼이나 애처롭다. 달력 하나, 그림 한 장도 희귀하다. 사람이 도리어 인테리어가 된다. 누군가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 방은 그 사람이 차지한 공간만큼의 생기를 겨우 얻는다. 사람이 없는 객실은 사망한 공간이자, 쓸쓸하고 쓸모없는 여백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는 눈동자는 죽은 공간과 더불어 생명을 잃어간다. 숨을 쉬어야 한다. 호흡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곳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슬픔이나, 우울 같은 감정이 자리 잡을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도 굳이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 방의 감정은 ‘냉소’다. 감정마저 얼어붙어있는 공간, 그래서 오히려 많은 것을 그립게 하는 공간이다. 내 그리움은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지나 신들의 대지에까지 다다른다.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대지와 그 위에 웅장하게 솟은 봉우리들 위를 비행한다. 셀 수 없이 많은 고개와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숨은 대지 위를 달린다. 이제 그리움은 나의 살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날아간다. 어머니. 아내. 대가없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인내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사랑에서 견고한 성스러움을 느낀다. 신이 내게 선물한 영혼들. 그들이 그리워진다. 그들에게 돌아가자면, 그러자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 잊어야 할 것을 뿌리치고 살 수 없는 이 땅의 삶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자연은 순환한다. 그러므로 저 폭풍우도 언젠가는 멈추고 부스러져서 나에게 태양과 바람의 땅으로 가는 뱃길을 열어줄 것이다.


장날이다. 이 도시의 특징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날에는 장이 선다는 것이다. 날이 궂을수록 장사꾼들의 목소리는 더욱 활기를 띤다. 사람을 볼 때마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소리로 말이다. 특히, 장날에는 인간이 내는 소리의 절정을 맛볼 수 있고, 소리의 집합과 조화와 불균형과 초조와 흥분과 인내와 고통과 희열을 한자리에서 모두 들을 수 있다.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는 장사꾼은 고기를 파는 사람이다. 그는 이분 도체된 소와 돼지를 주렁주렁 걸어놓고 손님들이 원하는 만큼의 고기를 말없이 썰어준다. 고기는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팔린다. 고기의 피와 살이 자신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기는 핏기 어린 몸집으로 자신의 삶과 살의 질을 이야기한다. 넉넉한 소의 살집과 선명하고 붉은 살은 그가 얼마나 주인에게 극진히 대우 받고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생명의 운행이 정지된 살과 혈관과 뼛속에는 아직 짐승의 영혼이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돈을 지불하고 죽은 짐승의 영혼을 부위별로 나누어 구원한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지불한 값만큼의 만족감이 스며든다. 장터에는 어물전이 없다. 세계적인 항구의 장터에서 생선을 팔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현상의 속살을 잘 들여다보면 이들이 얼마나 현명한 사람들인지를 금세 알 수 있다. 이 도시는 남성인구의 90%가 어부다. 물고기를 잡아다 먹는 경우는 있어도 사다 먹는 경우는 없다는 의미다. 나머지 10%, 즉 어부가 없는 집안의 사람들은 어부의 집에서 생선을 사거나 얻어다가 먹는다. 괜찮은 시스템이다. 관광객들은 생선을 사도 조리할 방도가 없다. 길에서 불이라도 땐다면 모를까 지붕을 가진 장소 어느 곳에서도 관광객들을 위한 조리도구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지불하고 생선요리를 사먹어야 한다. 생선이 남는 경우에도 걱정이 없다. 이 도시에는 대기업 수준의 통조림 공장이 무려 세 개나 돌아간다. 통조림 공장은 도시 여성인구의 60%이상을 피고용인으로 두고 있다. 이 거대한 그림 속에 어물전을 위한 여백은 없는 것이다. 장터에는 특별한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 있다. 바로 모래장사다. 그는 바다 건너 사막의 땅에서 모래를 퍼와 장에서 판다. 물장사는 들어봤어도 모래장사는 처음 들어보지만, 그는 실제로 모래를 판다. 관광객들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만 할 뿐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 관광객들에게 모래는 그저 모래일 뿐이다. 모래는 도시사람들이 모두 사간다. 행복을 주는 모래라 믿기 때문이다. 그밖에 다양한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연인이 이별할 때 남녀는 각자가 사서 간직해온 자기의 모래를 상대방에게 마지막 선물로 준다. 다음 인연에서의 행복을 바라는 의미이다. 죽은 남편이나 아내의 관 속에 넣어주기도 한다. 저 세상에서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도 부모는 아기를 위한 모래를 산다. 마을사람 모두가 산모와 아이에게 모래를 선물한다. 역시 여생의 행복을 바라는 의미이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행복의 땅을 알고 있고, 그곳에 갈 수 있으면서도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그곳이 사막 바깥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열려있지 않은 곳이라는 믿음과, 사막의 모래를 밟은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미신 때문이다. 장터는 꽤 규모가 컸지만 구경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장터구경을 마치고 뜨거운 차 한 잔이 생각나 음식장터 쪽으로 들어서려는데 길모퉁이에 자리를 편 노천카페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마시다가 식어버린 커피는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돈을 내고 식은 커피를 마시지는 않아!”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며칠 전 만났던 마른 목소리의 선장이다. 그는 컵을 손에 든 채 카페 주인에게 일갈을 퍼붓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가 손을 흔들어 자신의 테이블에 나를 불러 앉혔다.

“배는 여전히 못 구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래도 나는 자네를 내 배에 태울 생각이 없네.”

“알고 있습니다.”

“장터구경은 어땠나?”

“어물전이 없어서 섭섭하더군요.”

“바다에 나간 지 오래라 보여줄 물고기가 없는 게 안타깝군.”

“괜찮습니다. 생선 구경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선장이 커피를 타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앞에 놓고 간 커피도 꽤나 식어있었다. 선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야. 거의 일 년 가까이 폭풍우가 이어진 적이 있었지.”

장장 일 년에 걸친 폭풍우라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큰 폭풍우 주변으로 작은 폭풍우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작은 폭풍우들이 큰 폭풍우에 휩쓸려 몸집을 불리면서 세력이 이어졌다고 했다. 고기잡이배들도 일 년 내내 휴업이었고, 통조림 공장도 당연히 그랬다고 했다.

“그럼 그 일 년 동안 도시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산 겁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게. 다 지난 일이니까.”

선장은 그 해를 전쟁만큼 힘겨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다른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부들은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평생 어부가 일 년 만에 농사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통조림 공장은 도시의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통조림 창고를 개방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방파제 거리에서 주워 식량 배급하듯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다로 나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고기를 잡지 못하는 어부는 시체나 다름없네.”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어.”

“………”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은 언제나 기다림의 시간이다. 따지고 보면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사람의 일이란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이 되려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무엇을 얻으려면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어딘가에 가려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올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하고…. 그러니 죽고 싶으면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선장의 철학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그렇게 기다리고 계신 거로군요.”

“아니. 이번에는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을 생각일세.”

“며칠 파도가 잠잠하기는 했지만 폭풍우가 끝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근해라도 나가볼 생각이네.”

“위험할 겁니다.”

“어부의 생명은 바다와 이어져 있어. 바다를 떠난 어부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무겁고 극단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우리는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은 선장이 이미 마친 상태였다. 바다가 곧 뱃사람의 생명이고, 그러므로 바다와 끊어진 뱃사람은 곧 죽은 자라… 장터에서 호텔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비바람 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사막과 이어진 자일까. 나는 과연 행복을 알 자격이 있는 자일까. 나는 행복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과연… 그 땅이 주는 행복과 그 땅의 척박함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