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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대지 #10 . 초대 *골목 안의 집들은 모두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대문의 너비, 창의 위치, 벽돌의 색깔, 심지어 벽돌과 벽돌 사이의 간격까지 모두 똑같다. 번지수 없이는 편지가 제대로 배달될 수 없는 구조다. 노파는 골목의 끝까지 걸어간다. 마지막 집 앞에 선 노파가 나에게 문을 밀라는 시늉을 한다. 나는 우산을 접고 한 손으로 대문을 민다. 열리지 않는다. 나는 기름통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대문을 민다. 끼긱끼긱, 통나무여서 그런지 꽤 육중하다. 끼긱끼이익, 나무가 비틀어지는 소리를 내며 겨우 대문이 열린다. 짧은 터널 모양의 현관 너머로 마당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은 작지만 아늑하다. 마당 안으로 떨어지는 비와 낙숫물의 모습이 그림 같다. 마당 주위로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가득하다. 이 집의 주인..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9 . 비... 비가 그들의 소원이다. **모래사막은 바다에 연하여 있다. 결국 모래사막의 두 경계는 바다와 강이다. 바다에 풍랑이 일면 모래사막에는 바람이 분다. 바다에 폭풍우가 일면 모래사막에는 비가 내린다. 모래사막에는 오늘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날에는 모두가 잠을 설친다. 바람이 지배하는 밤은 어수선하다. 바람이 잠들면 밤도 잠이 들고, 바람이 깨어있으면 밤도 잠을 뒤척인다. 벌써 며칠째 바람이 분다. 매일이 바람이다. 그칠 기미가 없다. 바람은 잠든 사막을 깨운다. 모래알들이 기지개를 켠다. 잠에서 깨어난 모래알들은 바람의 방향을 좇아 행진을 시작한다. 모래알들은 서로의 몸을 부비며 노래를 부른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고음과 저음을 오간다. 바람의 줄기가 갈라지면서 모래알들의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바람이 사막의 합창을 지휘한다...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8 . 뒤돌아보기의 두려움 *이것은 분명 내가 아는 누군가의 손이다. 뒤를 돌아보기가 문득 두렵다. 내가 이곳에 와있는 것은 아내도 어머니도 모른다. 가족들이 아는 것은 내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나의 행선지를 끝까지 모르기를 얼마나 오래 기도해왔는지 모른다. 몰라야한다. 아무도 몰라야한다. 빛 아래에서는 빛의 가루로 쪼개져 숨고, 암흑 속에서는 묵은 먼지가 되어 숨어야 한다. 숨고 사라지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이제는 희귀해져버린 증발의 미덕으로. 그러나… 그러나…, 나의 증발로 인해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에 잠길 사람들이 있고,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려면 정해진 여정을 거쳐야 한다. 그나저나 이 손의 주인은 누구일까. 등에 땀이 고였다. 도시에 상륙한 폭풍우는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를 만나 ..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7 . 머무를 수 없는 삶의 행복 **인생은 들풀에 맺힌 이슬 같고, 현실은 희미한 그림자 같다. 이슬. 이슬의 시간. 이슬을 마시는 시간. 이슬의 시간은 영혼과 정신을 정결히 하는 시간이다. 사막의 사람들은 이슬을 마실 수 있는 날을 축복으로 여긴다. 이슬의 맛과, 이슬의 촉감이 주는 느낌은 뭐랄까… 표현하자면 그것은 영혼과 육신의 정화이자 축제다. 몇 방울만으로도 갈증이 말끔히 가시고, 몸에 필요한 모든 미네랄과 무기질을 채워주고, ph값의 균형을 잡아주는 천혜의 선물. 영혼을 담는 그릇을 정화하는 시간이다. 몸의 세포들이 춤추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의 가치를 지닌 시간이다. 모래사막의 사람들은 초원의 사막에서 얻어온 풀이파리를 이슬받이로 쓴다. 이슬을 마시는 시간은, 자연 안에서 생존하는 인간으로서, 자연 앞에 항복하는 시간이..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6 . 비, 원형극장, 오페라, 자폐증 *나는 석유곤로를 닮은 작은 난로와 주전자를 하나 샀다. 나의 육감이 맞는다면, 이 폭풍우는 적어도 반 년 안에는 그치지 않을 것이므로 늘어진 시간만큼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살림살이가 필요했다. 몇 종류의 차와 커피도 구입했다. 난로에는 등유를 넣어야했다. 나는 발코니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비에 잠긴 도시는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아 보였다. 가시거리의 의미가 부질없는 풍경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로비로 내려가 호텔 직원에게 가까운 주유소를 물었다. 그는 아주 가깝다는 단서를 붙이고는 호텔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다고 했다. 나는 10분 후에야 직원이 그려준 약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아주 가까운, 도보로 30분 .. 더보기
[삶] 벌레 같은 삶 인간의 삶은 벌레의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순간순간 느끼고, 경험하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혹은 자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결국 우리는, 우리를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최선인 존재들이다. youtube : https://www.youtube.com/channel/UCXbdgLjkg7QQxFqAglMiJ0Q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5 . 초원의 사막 **초원의 사막은 초원으로 시작된다. 초원과 모래사막의 경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선명하다. 신의 솜씨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풍경이다. 다른 색을 가진 두 개의 사막은 강을 기준으로 갈라진다. 강은 큰 땅덩어리를 횡으로 가른다. 강의 아래쪽은 모래사막이다. 강의 위쪽은 초원의 사막이다. 강가의 모래사막도 강물에 젖어있고, 강에 면한 초원의 사막도 강물에 젖어있다. 그러나 모래사막에는 단 1밀리미터 높이의 풀도 자라지 않는다. 온전히 모래다. 초원의 사막은 강물에 젖지 않은 땅부터 풀이 자란다. 물에 젖은 강가의 모습은 모래사막과 똑같다. 완전히 똑같다. 강은 마른 땅과 비옥한 땅의 젖줄이다. 하지만 모래사막의 사람들은 절대로 이 강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들의 식수는 오직 빗물이다. 두 사막의 사람들 모두 ..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4 . 이 도시에는 소음이 없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탓이다. 이렇게 지루하고, 따분하고, 골치 아픈 소설을 왜 쓰고 앉아 있는가...?저도 모릅니다. *몸이 얼어서인지 시궁창 같은 카페가 천국처럼 느껴진다. 나는 바 앞에 서서 뜨거운 블랙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카페 안은 마치 아직 덜 죽은 자들을 모아둔 임시 시체안치소 같다. 웨이트리스가 김이 서린 창을 행주로 닦아낸다. 행주를 떼기가 무섭게 닦아낸 자리 위에 다시 김이 서린다. 사람들은 조금씩 부랑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남자들은 수염이 거칠어졌고, 얼굴가죽에는 쪼글쪼글한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여자들은 더 이상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다. 며칠씩 못 씻고 시장 좌판에 앉은 듯 남루한 행색에 동공마저 상한 노른자처럼 풀려 있었다. 나는 가벼운 도수의 술을 한 잔 더 청해 마신 후 방으로 올라왔다. 여정에 지쳐.. 더보기
[삶] 악몽을 피하는 방법 육체 노동자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아십니까?고된 일과로 몸과 정신이 곤죽이 됐는데 일과 스트레스에 온 신경이 곤두선 몸뚱이가 쉽게 잠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일의 여운과 긴장이 쉽게 가시지 않는 탓입니다.그래서 술로 몸과 긴장을 녹이는 것이죠.술을 마시면서 어제 일, 그제 일, 그그제 있었던 재미있고 우스운 일들을 떠올리며 웃습니다.이 시점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은 안 좋은 일을 떠올리는 거예요.안 좋은 일을 떠올리면 당연히 기분이 안 좋아지겠죠?게다가 더욱 안 좋은 건 그런 생각을 하고 난 후에 잠이 들면 꿈 속에서도 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신기하지만 불쾌하죠. 아무리 꿈이라도 꿈에서조차 일을 한 날에는 깨고 난 후에도 실제로 일을 한 것처럼 몸이 노곤하다는 거예요.그래서 좋았던 일들을 굳이 떠올.. 더보기
[스케이팅의 시작] 어떤 스케이팅을 할 것인가? 어떤 계기로든, 어느 날 불현듯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스케이트로 어떤 재미를 즐기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시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냥 재미로,누군가는 운송수단으로,누군가는 선수나 제조자로서의 직업으로,누군가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단련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고,누군가는 스케이팅을 몸으로 하는 명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스케이트라는 것을 신을 수 없는 몸의 병을 가졌던 저는,‘스케이트를 한 번 신어보고 싶다...’ 라는 막연한 소원으로 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되었든,여러 스케이팅의 스타일과 매력을 먼저 살펴보고 시작한다면,스케이팅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조금 더 아낄 수 있고,다양한 스케이팅의 ..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3 . 비 내리는 항구 *벌써 보름이 지났다. 폭풍우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배는 승객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 긴 기다림은 때로는 독이 된다. 사람들은 술과 커피와 침묵을 친구 삼아 더딘 시간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일 좁은 카페에 모여 침묵을 연습했다. 비바람의 비명 소리가 거리를 감아쥐고 있었다. 시간은 고인 강물처럼 느리게 흘렀다. 사람들의 몸에서 피어오른 땀과 입김으로 유리마다 김이 서렸다. 스무 개 남짓의 테이블이 놓인 카페테리아에 백여 명이 넘는 인간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연인들은 의자 하나를 반으로 갈라 앉거나 연인의 무릎 위에 앉기도 했고,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누에고치처럼 벽마다 들러붙어 서있었다. 사람들은 산소 호흡기에 매달린 식물인간처럼 호흡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일행이 있는 ..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2 . 사막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태양과 바람이었다. 풍화. 단 한줌의 여과도 없이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은 바위가 바스러질 정도로 대지를 바짝 건조시키고, 거친 바람은 태양이 말려놓은 바위 껍질을 긁어내어 모래로 바꾸어놓는다. 바람에 쓸리는 모래알은 거대한 바위의 발목 이곳저곳에 구멍을 뚫고 구멍과 구멍 사이에 기둥을 남긴다. 바람은 해일처럼 모래를 휩쓸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바위기둥 뒤에 숨어 바람이 잠들기를 기다린다. 대기의 주인은 불같은 태양과, 칼날 같은 바람과, 차가운 비의 순서로 바뀐다. 태양과 바람과 비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시간은 밤뿐이나 밤은 고작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의 사람들은 육신을 입은 인간이지만 짐승보다는 영혼에 가깝다. 태양과 바람은 돌만 깎아내는 것이.. 더보기
미증유의 대지 #1 . 프롤로그 미증유의 대지 / 부제 - 기억을 마시는 강 * - 주인공 ‘나’의 이야기** - 사막과 강의 이야기 * 시작 긴 시간 동안 망각을 소원해왔다. 원인은 내가 사랑한 두 사람에게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에 있다. 사랑은 대부분 아름다우나 세상을 흐르는 모든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불행히도 나의 것 역시 그러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영혼의 흥분과 떨림으로 행복에 겨워하지만 그 많은 사랑의 불꽃들 중 대다수가 완성된 행복에 닿지 못하고 추락한다. 내 사랑은 시작부터 그랬다. 미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비틀어져있었다. 행복은 잠시였고, 삶은 수렁에 빠졌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래, 세상에 영원한 고통은 없을 것이라 자위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끝난다는 확신만 있다면 견뎌낼 희망은 있는 .. 더보기
[삶] 갑과 을은 서로 전쟁하지 않는다. 갑과 을은 한 편이다. 동지다.동지지만 평등한 관계는 아니다.갑이 철갑을 두르고 있는 한 을은 언제나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나는 을 소속의 시급제 노동자다.그렇다. 우리는 언제든 갑의 입김에 먼지처럼 흩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youtube : https://www.youtube.com/channel/UCXbdgLjkg7QQxFqAglMiJ0Q 더보기
기억과 상처를 다스리는 힘 - 장편 '미증유의 대지' 소개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어디에 새겨지는 것일까요?저는 기억과 본성의 저장고가 단지 뇌일 거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인간 육체의 세포 전체가 나름대로 정해진 분량의 저장고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로 인정 받는 우리의 '영혼'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미증유의 대지'는 기억과 상처를 치유하는 강을 찾아 떠난 주인공의 짧은 여행기입니다. 더보기
[삶] 밤 하늘을 즐겨 보는 시급제 노동자... 어둡지만 투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어제의 빛이 지나간 흔적들을 따라가 보고는 해요.세월은 그렇게 흐르죠.'어제'라는 시간이 한없이 쌓여가면서요. 저는 사실 오늘을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저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어제예요.어제의 행복을 떠올릴 수 있는 오늘이 행복하거든요.오늘은 아직, 아무도 모르잖아요? 건강하게. 오래. 행복하게.어제를 추억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하지만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야,내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어제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사람들은 잘 모르죠. 사랑해요...잘 자요... youtube : https://www.youtube.com/channel/UCXbdgLjkg7QQxFqAglMiJ0Q 더보기
[초단편] 울트라 쏠티 스토리 소갯말 네, 그렇습니다.오랜만에 녹음을 해보았습니다. https://youtu.be/woIQZG6hZHY 더보기
불면인 #44 (마지막 회) . 겨울 . 마지막 메모 . 여자의 꿈 겨울 누군가에게는 이 투명하고 냉랭한 대기가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다. 짙푸른 하늘. 새하얀 구름. 호흡하기조차 벅찬 맑은 공기. 내게도 그렇다. 그러나 눈이 보는 계절과, 살이 느끼는 계절은, 다르다. 시간은 때로는 더디고 때로는 빠르게 흐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 시간이 가장 더디게 흐르는 계절이다. 시간과 함께 심장도 느리게 뛴다. 느리게 뛰는 심장은 그 느림만큼이나 느리게 가는 계절을 증명하고, 느리도록 느리게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슬프다. 추위가 다시 살을 덮친다. 누군가는 거리의 삶에서 외로울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내게 거리의 추위는 곧 외로움이다. 극한의 추위는 늘 극한의 고독을 몰고 다닌다. 그들은 마치 소떼와 소몰이꾼.. 더보기
불면인 #43 . 감옥 . 꿈 - 항해 감옥 나는 내 손목의 맥박이 뛰는 것을 본다. 나는 믿을 수 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죽고 사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운명을 온전히 내 것이라고, 내 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슬프다. 사람 숨. 살가죽보다 질긴 숨.결국 나는 깊은 잠에 빠지기로 했다. 자살을 위한 것은 아니다. 죽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처음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죽을 수 없다. 잘 죽어지지 않는다. 정해진 수명이 차기 전에 죽을 수 있으려면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조금 더 즐겁게 살려고 애쓰거나, 고통스럽더라도 이어가거나… 아무튼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짐승의 숙.. 더보기
불면인 #42 . 여자 . 대화 여자 그날 그 시간에 자신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 여자는 정확히 기억한다. 평소에 그렇게도 진저리치던 동네를 왜 걷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바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여든아홉 개의 계단을 올라가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 마흔한 개의 계단을 올라가 전철을 기다리고, 전철을 타고, 시간이 흐르고, 전철에서 내리고, 버스로 두 정거장의 거리를 걷고, 언덕길을 오르고 나서도 예순여덟 개의 계단을 더 올라야 닿는 집. 걸어야 하는 길은 구부러지고, 비뚤어지고, 높고, 멀었다. 뜨거운 여름이나 찬 겨울에는 일터에 나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일보다 더 고됐다. 여자는 남자를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남자는 집을 짓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한겨울에 쓰레기처럼 나뒹.. 더보기